Revisiting Machiavelli-1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탁월한 리더가 없었던 두 나라
마키아벨리의 조국 이탈리아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어쩜 그리 두 나라가 똑같은지 감탄하게 된다.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첫 번째 공통점은 지정학(地政學)적인 것인데 두 나라 다 반도(半島) 국가이고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약소국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스페인),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오스만튀르크라는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이 해방 이후부터 미국, 중국, 소련(러시아),일본이라는 4대 강국의 눈치를 봐야했던 것과 비슷하다. 16세기의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로 내분을 거듭하고 있던 것이나 삼국시대부터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분열의 역사도 얼추 비슷하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나라 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민족이란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별하는 예술적 감각이 빼어나고, 음식 문화가 발달되어 있으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능수능란한 민족들이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는 콩쿠르에서 다수의 한국인이 각광을 받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랑하는 개인적 자질의 우수성과 정확하게 대척을 이루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세 번째 공통점인데 탁월한 리더의 부재(不在)라는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미성년자와의 성추문과 미디어를 통한 정권 장악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라는 인물이 총리직에 세 번씩이나 임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탈리아에 탁월한 리더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부터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많은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퇴장을 지켜봐야만 했던 우리의 현실도 이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복의 총에 맞아 죽은 대통령, 퇴임 후에 교도소로 직행했던 대통령, 자살로 격동의 삶을 마감했던 대통령까지 우리는 대한민국 리더들의 비극적 종말을 지켜보는 아픔을 가진 민족이다. 존경할 만한 리더를 가지지 못해 우울한 우리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마키아벨리다. 마키아벨리의 고민도 우리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없는 것일까? 이탈리아와 피렌체가 안고 있는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에 탁월한 리더는 아예 탄생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난세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분열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공직자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임무
마키아벨리는 유능하고 부지런한 피렌체 공화국의 엘리트였다. 공직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1506년 12월6일, 마키아벨리는 신설된‘피렌체 9인 군사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된다. 외교업무를 담당하던‘제2 서기장’의 임무와 오늘날 국방부의 역할을 했던‘10인회’서기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또 다른 주요 보직이 맡겨진 것이다. ‘피렌체 9인 군사 위원회’는 오늘날 육군 사령부의 참모부에 해당한다. 피렌체를 방어하기 위해 군인을 모집하고 훈련시켜‘조국의 수호자’를 만드는 부서였다. 무려 3개의 보직을 동시에 맡았지만 마키아벨리가 수령하던 급여는 한 직책에서 지불하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불평하지 않았다. 피렌체인은 스스로를 명예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일종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으나 마키아벨리는 여기에다 일 중독증까지 더해진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용병부대의 폐해를 지적하며 시민군으로 구성된 자체 방위군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군사 전문가이기도 했다.1
자신의 평소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는1507년 한 해 동안 토스카나 지방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피렌체 공화국의 자체 방위군을 조직하기 위해 모병 활동을 펼친 것이다. 그의 뒤에는 프란체스코 소데리니 추기경이라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었다. 우르비노에서 함께 체사레 보르자와 협상을 벌였던 피렌체의 유력 인사로 그의 동생인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 1450-1522)는 피렌체 행정부의 수반격인 콘팔로니에레(총독)로 재직하고 있었다. 총독의 형이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 그야말로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고 할 만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마키아벨리는 늘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당신이 업무에 유능하고 매사에 부지런할 뿐 아니라 최고위층의 후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출신도 변변치 않았던 마키아벨리가 공직을 3개나 꿰차고 있고 피렌체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데리니 형제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시기(猜忌)할 만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경쟁심이 남다르다. 피렌체의 권력 구조에서 소외돼 있던 많은 귀족들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부정적인‘뒷담화’를 수군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아첨꾼(mannerino)’으로 불렀다. 알라만노 살비아티란 귀족은 마키아벨리를‘건달’이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곤 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모난 돌이 정을 맞게 되는 것은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서서히 마키아벨리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피렌체 공화국의 운명과 궤적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 형제의 최측근 참모였다. 피렌체 공화정과 소데리니 형제의 행운이 마감되는 날, 필연코 그의 운명도 파국을 맞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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